하얀집
정북 일조 사선을 제대로 받는 작은 땅에서는 대부분 사선제한이 형태를 결정하고 만다. 보이지 않는 선이 면을 제단하고 면이 스트레치 되어 볼륨을 만든다. 그렇게 드러난 건물의 얼굴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그 익숙하고 지루한, 개성 없는 얼굴에 표정을 갖게 하고 싶었다. 화장이 아닌 표정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중요한 목표점이 되었다.
표정에는 주체의 감정이 담기고 표정을 읽는 사람에게도 어떤 감정 상태인지 해석하게 한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많다. 그래서 표정은 다층적이다. 조직의 굳고 무른 정도, 성글고 배인 정도가 다른 것이 모여 켜를 지으면서 쌓인 것을 결이라 한다. 투명한 것부터 성글고 밴 것까지, 무르고 굳은 재료들로 켜를 지어 구성했다. 투명과 불투명 사이의 성김이 중요하며 낮과 밤, 시간의 개입이 그 부분을 도와줄 것이다. 하여 단순한 레이어가 아닌 결이 되어 화장 안의 표정이 드러나길 기대한다.
'사는 집'과 '버는 집'
자본주의 사회에서 본인의 자산을 증식하려는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때론 그 욕망이 지나쳐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행위들을 벌여 왔고 부동산에서는 그것이 투기란 형태로 나타났다. 부동산 투기는 자본주의 시장 질서를 교란시키는 악성 종양이었고 어느 정부든 척결해야 할 요주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부동산 투자는 당연한 듯 투기의 의심을 받았고 사회적 인식 또한 좋지 않은 측면이 있으나 또한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투자처이기도 하다.
전통적 방식의 부동산 투자 대상은 아파트였고, 갈아타거나 갭 투자를 하거나 임대를 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다. 겨우겨우 집 한 채를 마련한 대다수의 일반인이 할 수 있는 방법이란 본인이 거주하는 집을 미래가치가 담보될 수 있을 만한 곳에 매입하고 적당한 시기에 갈아타거나 아님 어느 정도의 여유자금 또는 은행에 힘을 빌려 갭 투자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내가 ‘사는 집’의 가치는 말 그대로 ‘사는’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버는’ 쪽에 있을 수밖에 없다. ‘사는 집’이 곧 ‘버는 집’이 되어 왔고, 사는 데에 맞지 않고 불편함이 있더라도 ‘버는 집’의 가치가 높다면 좋은 집이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몇 년 사이 ‘사는 집’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살기 좋은 집을 소개하는 매체가 급속도로 늘었고 ‘집’의 가치를 ‘자산’보다는 ‘가족의 삶’에 위치시키는 건축주를 많이 보게 됐다. 이러한 상황이 반영되어 새롭게 등장한 주거형태가 ‘상가주택’이 아닌가 싶다. ‘상가주택’의 기본 거주형태는 건축주 본인이 거주하며, 나머지 주거와 상가를 임대하는 방식이다. ‘사는 집’과 ‘버는 집’이 합일이 된 상태, ‘집’으로 부동산 투자를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꿈같은 이상적 방식이라 보였는지 많이 지어졌고 또 지어지고 있다.
건축주 본인이 거주하는 ‘사는 집’은 본인과 가족의 의지를 담아 그들이 주택에서 원하는 바를 최대한 담길 희망 했고 함께 지어지는 ‘버는 집’은 물리적 방의 개수와 면적을 통해 이른바 ‘수익’을 최대한 끌어올리려 한다. ‘버는 집’에 대한 비슷한 욕망과 실현으로 나타나는 주거형태는 이른바 아파트 시세처럼 상가주택 임대 시세를 형성했고 이 시세를 맞추기 위해서는 비싸게 구입한 지가만큼 ‘버는 집’의 건설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시도는 불가피해졌다. 악순환이다. ‘사는 집’에 살며 벌기를 바라는 건축주나 ‘버는 집’에 살며 ‘사는 집’에 살고 싶은 욕망을 실현하지 못한 사람 모두에게 불행이다.
‘아파트’란 주거형태가 갖는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가 ‘사는 집’과 ‘버는 집’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이 그 집을 어떠한 방식으로 대하는 가에 달려 있을 뿐, 철저히 익명적이고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아파트는 스스로가 그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지는 않다. 아파트 시장의 경쟁적 구도 하에 건설사는 상품으로써의 가치를 최대한 끌어올리려는 시도를 꾸준히 한 바, 우리나라의 아파트는 꽤 높은 수준에 올라와 있다. 뭔가 개인의 욕망을 일일이 채워주지는 못하더라도 보편적 욕구를 실현하는 데에는 최적화되어 있어 ‘사는 집’으로서의 만족도는 높다. 이 지점에서 ‘사는 집’은 ‘버는 집’을 목적으로 짓는 집과 수준이 갈릴 수밖에 없다.
‘버는 집’을 ‘사는 집’처럼
임대를 목적으로 하는, ‘버는 집’ 짓기를 계획한 건축주에게 우리가 해준 말은 얼마만큼의 양으로 이 땅을 채워야 더 많이 벌 수 있는지 ‘버는 집’의 노골적인 자세보다 ‘사는 집’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는 집’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때에 ‘버는 집’의 가치가 하락하지 않고 지속 가능하다 믿었기 때문이다.
아파트와는 다른 물리적 조건의 도심 속 작은 공동주택이 ‘버는 집’의 노골적 자세가 아닌 ‘사는 집’으로서 배려를 담으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우린 집에 표정을 담아 보기로 했다. 아파트가 가지는 편리성, 쾌적성의 장점을 따라가기 어렵다면 그 그늘인 익명성과 무표정만큼은 벗어나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표정은 주체에 대해 객체가 느끼는 감정의 모습으로, 집이 표정을 갖는다는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이 단순히 그 공간을 점유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집과 감정을 교류한다는 것이고 ‘사는 집’이 되기 위한 중요한 기초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표정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사용한 장치는 한쪽이 사선으로 접힌 ㄷ자 형태의 알루미늄 루버였다. 이는 단순히 면과 선의 다층적 구성을 통해 외부에서 보이는 표정의 변화만을 의도했다기보다는 비록 작은 원룸이지만 사는 사람이 창을 통해 밖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집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표정을 감지할 수 있기를 기대함이 더 컸다.
건축개요
위치: 서울 강서구 방화동
용도: 근린생활시설, 다세대주택
규모: 지상5층
대지면적: 174.00㎡ (52.64py)
건축면적: 104.04㎡ (31.47py)
연면적: 336.94㎡ (101.92py)
건폐율: 59.79%
용적률: 193.64%
구조: 철근콘크리트 구조
주차대수: 4대
사진: 최진보
시공: 쓰리스퀘어
설계: 투닷건축사사무소